장애인 일자리, 편견과 차별을 넘어⑫

(출처=컨슈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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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슈머치 = 김은주 기자]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에요. 남들처럼 돈도 벌고 여행도 다니면서, 정말 평범하게요”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게임하는 걸 좋아하고 여행을 사랑하는 어느 20대 청년이 밝힌 자신의 최종 꿈이자 인생의 목표다. 이러한 대답을 듣고 누군가는 ‘젊은 사람이 왜 조금 더 패기있고 원대한 꿈을 품지 않느냐’고 쉽게 말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폐성장애 3급 판정을 받은 백준엽(남‧24세)씨에게 있어 남들과 똑같이 평범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은 그 무엇보다 빛나고 특별한 꿈이다.

전 세계적으로 신생아 100명 당 1명꼴로 자폐를 가지고 태어난다. 우리나라는 이보다 자폐인 비율이 더 높은 편이며, 여자보다 남자가 자폐성장애 진단 비율이 높다고 한다.

이처럼 자폐성장애는 비교적 흔한 발달장애 유형임에도 여전히 사회적 편견과 오해가 넘쳐나고, 관심과 대책은 턱 없이 미흡한 편이다.

성인이 된 이후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던 준엽 씨는 발달장애인의 취업 교육 및 알선을 돕는 한국자폐인사랑협회 산하 직업재능개발센터를 통해 안정적으로 직장 생활에 정착한 케이스 중 한 명이다.

작년 4월 롯데월드 내 위치한 패스트푸드 식당 ‘카페 다쥬르’에 취업한 준엽 씨가 일을 시작한지도 어느 덧 반년이 넘었다. 그 곳에서 준엽 씨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하루 7시간 동안 테이블 정리 및 바닥 청소, 식자재 운반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아무래도 놀이공원이라는 장소 특성상 주말에 굉장히 많은 사람이 몰리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힘든 건 있죠. 그러다 보니 예전 같으면 휴일에 게임을 하거나 어디 놀러가는 일이 많았지만 요즘은 주로 잠을 많이 자는 편이에요. 그래도 그 외에 다른 부분은 전혀 힘들지 않아요. 일을 하는 게 무척이나 보람차고 행복하거든요”

(출처=컨슈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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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전과 후를 비교해 준엽 씨가 좋아하는 것들, 예컨대 게임이나 여행에 할애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대폭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는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는 현재의 삶이 이전보다 훨씬 만족도가 높고 행복하다고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이유를 묻는 자체가 '우문(愚問)'이지만 그래도 "왜"라는 물음표를 던져봤다. 그러자 그는 “돈을 벌 수 있으니까요”라는 아주 명쾌한 대답을 한 뒤 수줍게 웃어보였다.

실제로 직장 생활을 통해 게임, 여행, 사진 등 좋아하는 취미 활동 시간은 줄었지만 대신 그는 자신이 직접 번 돈으로 더욱 당당히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지난달 준엽 씨는 부모님이 보태주신 약 50만 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경비를 자신이 부담한 채 약 열흘간의 휴가를 내고 캐나다에 다녀오기도 했다.

올해로 출시 30주년이 된 고전 액션게임 ‘스트리트 파이터’의 연례 대회 중 하나가 캐나다에서 열리는데 그 곳에 직접 참가하기 위해서다. 여행과 게임을 좋아하는 그에게 있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기회로, 벌써 몇 해째 꾸준히 방문 중이다.

“스트리트 파이터는 격투게임이다 보니 힘에서 밀리다 보면 자주 지게 돼요. 하지만 다시 일어나고, 수련을 쌓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배우게 되는 것 같아 저에게 굉장히 긍정적인 메시지를 줘요”

준엽 씨는 이제는 어엿한 직장인이다 보니 시간을 빼는 것이 자유롭지 못한 자신이 올해도 빠짐없이 장기간 캐나다를 다녀 올 수 있었던 건 같이 일하는 점장님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감사의 표시도 잊지 않았다.

“매장 내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는 한 시간을 뺄 수 도록 허락해주셔서 내년에도 무사히 캐나다에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요”

'게임폐인'이라는 말이 생성될 만큼 강한 중독성으로 많은 기성세대들에게는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한 취미 생활이지만, 준엽 씨에게 게임이란 존재는 오히려 바깥과의 ‘소통’ 창구 역할을 톡톡히 해 준 소중한 매개체가 됐다.

“만 19세가 됐을 때 사회생활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집 밖으로 나가게 됐는데 그 계기가 게임이에요. 같은 게임을 즐기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말 많은 기쁨을 느끼게 됐어요. 그 중에는 각자의 분야에서 이름이 난 사람도 있고, 외국인도 많아요. 이번에 캐나다 여행을 같이 간 친구도 거기서 만난 친구에요. 그 때 뭔가를 해내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와 경험을 해봐야 한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죠”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은 게임하는 자녀를 못 마땅하게 보기 마련이다. 준엽 씨의 부모님 역시 마찬가지다. 준엽 씨는 게임 활동에 몰입하는 걸 우려하는 엄마를 설득하는 작업을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다.

그는 “엄마도 복잡한 심정이실 거예요(웃음). 그래도 믿고 지켜봐달라고 말 했어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출처=컨슈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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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면서 가장 보람 될 때가 언제인지 묻는 질문에 그는 “돈이 들어 올 때”라는 다소 솔직 발랄한 대답을 해놓고는 농담이라며 손사래 쳤다.

“제가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무언가를 도와준 것에 대해 손님들이 ‘고맙다’, ‘감사하다’라는 표현을 해줄 때 일하는 보람을 느껴요. 오래 일하다보니 자주 오는 손님의 경우 얼굴이 익어서 마치 평소 아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도 하게 돼요”

반대로 손님 때문에 서운한 감정이 들거나 기분이 나쁠 때는 언제였는지 물었더니 잠시 고민하던 그는 “무심한 손님을 보면”이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무심한 손님이라는 건 지킬 걸 안 지키는 손님들을 뜻해요. 음식을 먹고 분리수거 등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거나 퇴식대가 아닌 곳에 선반을 두고 가버리는 사람이 많아서 힘든 부분이 있어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쓴맛도 보고 단맛도 보게 된다. 6개 월 가량의 직장 생활을 통해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에피소드를 겪었다는 준엽 씨가 자신의 속마음을 가장 많이 털어 놓게 되는 존재는 역시 가족이다.

“가족은 저랑 가장 가까운 존재잖아요. 직장에서 있었던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고, 서러웠던 일도 하소연하게 되죠. 그러고 나면 훨씬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에요. 의지도 되고요. 가족이 그래서 중요한 것 같아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꾸준히 일하고, 시간이 되면 자격증도 따면서 자기개발에 힘을 쏟고 싶다는 준엽 씨는 훗날 제과제빵사 되고 싶다는 소망도 드러냈다. 본인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던 시절, 그나마 음식을 만드는 일에서 가능성을 봤다고 그는 말한다.

제과제빵에 대해 ‘자신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일’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 하는 그에게 ‘할 수 있는 일’이자 ‘하고 싶은 일’도 되는 지 조심스럽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두 가지의 가장 접점에 있다는 게 정답이겠네요. 사실 빵을 만들어 본게 굉장히 예전 일이에요. 하지만 다시 한 번 꼭 해보고 싶어요. 스스로 빵을 만들고, 괜찮은 결과물이 나오면 굉장히 보람되거든요. 그 기분을 다시 느껴보고 싶습니다”

준엽 씨가 지역사회 내에서 더 큰 날개를 펼치기 위해서는 자폐인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사회적 인식도 많은 부분 개선돼야 할 것이다.  

“자폐를 무조건 고쳐야만 하는 질병으로 보는 시선이 많은 게 사실이에요. 자폐인의 특성을 이용해 더욱 좋은 쪽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봐 주면 좋겠어요. 반드시 그런 환경이 조성되길 바랍니다. 무시무시한 질병이 아니라, 그냥 조금 다른 한 사람일 뿐이에요. 누구나 각자 개인의 특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물론 그는 사회적 인식뿐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그동안 적(敵)을 많이 만들면서 살아왔던 것 같아요. 제가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에 부딪히고 아픈 적도 많았어요. 그런데 이제와 돌이켜 보면 아팠던 이유가 내 스스로를 많이 믿지 못해서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나 자신을 의심을 했던 거죠. 앞으로는 직장 생활을 토대로 스스로 확고한 의지를 갖고 사고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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