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호 칼럼] 누구나 알고 아무나 하는 인문학 <5>

안녕하십니까. 여러분과 인문학을 함께 공부할 윤성호라고 합니다.

그간 문학, 역사, 철학 등 소위 인문학으로 불리는 공부를 하며 조금이나마 얻은 지식을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이번에 컨슈머치와 함께 독자 여러분을 찾아뵐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우선 인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고, 종교와 예술과 철학이 어떻게 발생됐는지 살펴본 후 동·서양의 철학과 역사, 종교에 관해 고찰해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합니다.

<저자의 말>

 

기하학과 플라톤

(*이번 글은 다소 어려울 수 있습니다. 네이버 등을 참고하면서 포기하지 말고 꼭 읽어 주세요.)

 

플라톤은 아테네에 제자들을 가르칠 학원을 열고 그 이름을 아카데메이아(Academeia)라고 붙였습니다.

그는 학원 입구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는 경구를 붙여 놓았습니다. 아마도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또 이 말은 어떻습니까? “서양철학을 알려면 기하학을 알아야 한다”

들어본 적이 없다고요? 어쨌든 이런 말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기하학과 서양철학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삼각형 세 내각의 합은 180°' 등을 공부하는 기하학과 '인간과 자연 그리고 우주의 본질을 탐구한다'는 철학이 어떤 점에서 관련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기하학은 어떤 학문?

기하학은 영어 지오메트리(geometry)의 지오를 음차(발음을 빌려옴)해 만든 한자어이고 지오메트리(geometry)는 라틴어 ‘geometria’에서 나온 말입니다. 또 ‘geometria’의 geo는 그리스 말로 ‘땅’이고 metria는 ‘재다’라는 뜻입니다. 지오메트리는 결국 ‘땅을 재는 학문’입니다.

지오메트리가 땅에 금을 긋고 면적을 재는 데서 시작된 만큼 지오메트리 즉, 기하학은 주로 점·선·면이 이루는 면적과 부피를 다룹니다. 그래서 현재도 기하학은 점과 선이 만들어내는 면과 도형 그리고 공간의 수리적 성질을 배우는 학문으로 규정합니다.

그런데 지오메트리에 대응하는 한자말 기하학(幾何學)은 누가 언제 만들었을까요? 이 한자어를 만든 사람은 중국 사람도 일본 사람도 아닌 이탈리아 사람 마테오 리치입니다.

마테오 리치(1552-1610)는 중국에 처음으로 천주교를 전파한 예수회의 선교사로 유명합니다. 그는 천문학과 수학을 중국에 소개하면서 섬세하고 엄밀한 서양식 논증과 논리를 전개해 중국학자들의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유창한 중국어와 해박한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유교경전을 자유롭게 인용하는 그를 당대의 중국 석학들이 유학자(儒學者)로 대우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기하학이라는 한자말을 만들어 냈으니 놀랄 일도 아니지요.

그는 천주교의 하나님 개념을 중국에 소개하기 위해 지오메트리라는 서양 학문을 활용하기로 했고 이를 위해 기하학이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기하학이 어떻게 천주교의 하나님을 설명하는지는 다음 기회에 공부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기하학이라는 말이 생겨난 과정만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고대 그리스에서 기하학을 집대성한 유클리드의 책을 한자로 번역해 기하학이라는 학문을 중국에 소개합니다. 유클리드(Euclid, 에우클레이데스 300? B.C.)는 그리스의 수학자로 그 당시까지 알려져 있던 모든 기하학적 지식을 하나의 이론으로 체계화해 <원론(Elements, 그리스어로는 Stoikeia)>이라는 불멸의 기하학 책을 남겼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유클리드의 ‘원론(Elements)’을 기하원본(幾何原本)으로 번역합니다. 기하학에 해당하는 보통명사 지오메트리의 지오(geo)를 중국말 ‘지허’幾何’로 음차합니다. 그런데 중국말 ‘지허’(幾何)는‘얼마냐?’의 의미이니 면적과 부피를 숫자로 표현하는 지오메트리의 본래적 성격과도 잘 맞았습니다.

 

이집트 - 실용의 기하학

기하학의 시작은 이집트입니다. 바빌로니아의 천문학에서 시작됐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쨌든 나일강의 범람이 잦은 이집트에서는 아무리 큰 홍수가 나도 땅의 면적과 모양을 일정하게 구분하고 복원하며 그 면적을 계산해야 했기에 측량과 측정 중심의 기하학을 발전시켰습니다.

따라서 이집트의 기하학은 실용적·경험적 기하학이라고 합니다. 물론 실용적이고 경험적인 기하학은 중국과 인도에서도 당연히 존재했지요. 실용적 기하학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조에서 찬란한 꽃을 피운 후 그리스로 전파됩니다.

 

그리스 - 생각의 기하학

땅의 면적을 측정하고 피라미드를 짓는데 활용하던 기하학이 그리스에 수입되자 전 우주를 설명하는 신비로운 학문으로 비상합니다. 그리스인들은 도형의 면적과 부피를 계산하면 그만이었던 이집트의 기하학을 논리와 증명을 통해 결론을 도출해내는 사유의 체계로 전환시킵니다. 그들은 현실의 기하학을 머릿속으로 끌어들여 점과 선 그리고 도형을 형상화하고 수리화해 기하학적 결론을 논증했습니다.

조금 어렵게 얘기하면 기하학의 대상인 점·선·면 등을 추상적으로 정의한 후 공리를 설정하고 공리적인 체계 안에서 연역적인 논리전개를 통해 결론을 증명해내는 학문으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이 부분이 중요하긴 하나 어렵기도 하거니와 여기서 이것을 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핵심은 그리스인들의 기하학 공부는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생각 속에서 추상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입니다. 영화 ‘메트릭스’에서 나오는 메트릭스의 세계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의 기하학적 학문 행위는 현실이 아니라 메트릭스 세계에서 일어납니다.

이집트와 중국인들의 관점에서 기하학적 점과 선은 우리가 종이에 찍는 점, 땅에 긋는 선과 다를 바 없지만, 그리스인들의 기하학적 점과 선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메트릭스인 가상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생각 속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점은 위치만을 나타낼 뿐 넓이나 부피가 없습니다. 현실에서는 그런 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0.000000001%의 오차도 없이 “세 내각의 합이 180°인 삼각형”을 그려낼 재간도 없습니다. 오로지 가상의 세계, 머릿속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의 기하학에서 다루는 모든 형상은 사물의 체계가 아니라 사유의 체계이고 그리스의 기하학은 사유의 기하학, 생각의 기하학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 - 기하학적 사유공간

20세기의 석학으로 유명한 하버드 대학의 철학과 교수 화이트 헤드(1861-1947)는 “서양철학사는 플라톤의 철학을 설명해나간 각주(脚註, 뜻을 보충하거나 풀이한 글을 본문의 아래쪽에 따로 단 것)”라고 단언했습니다. 이 말은 서양철학 2,000년의 역사는 플라톤의 주장을 후대의 철학자들이 각자의 생각으로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서양철학은 플라톤을 이해하지 못하면 접근할 수 없습니다. 플라톤을 이해하려면 그의 ‘이데아’를 알아야 합니다. 이데아는 많이 들어봤죠? 그런데 이데아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설명은 매우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기독교의 천국이나 불교의 극락과 비슷한 그 무엇으로 이해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인식하는 한 플라톤의 이데아는 아득히 멀어집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현실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상향이나 사후 세계의 천국 같은 곳이 아닙니다.

플라톤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현실의 물리적 세계는 불완전한 세계라고 보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완벽한 세계는 관념의 세계며 사유의 세계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인식되는 논리의 세계만이 완전한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세상을 기하학에서 찾았습니다. 기하학을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이 이성이고 그것을 인식하는 생각의 공간을 이데아로 본 것입니다. 즉, 이데아는 인간이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가상의 공간입니다. 따라서 플라톤의 이데아는 현실과 사후에 존재하는 그 무엇과는 차원이 다른 세상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인간의 생각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세계이나 모든 인간에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하학을 이해할 정도의 지성을 갖춘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이성과 논리의 세상인 것입니다.

서양철학은 2,000년 동안 플라톤이 제공한 이데아의 틀 속에서 인간 이성의 본질을 연구한 역사입니다. 그런데 인간 이성은 무엇입니까?

 

기하학적 이성 - 서양철학의 빗장을 푸는 열쇠

그리스 사고의 핵심을 한 문장에 담는다면 “사유가 감각보다 고귀하며 사유의 대상이 지각의 대상보다 더 실재적이다”는 말로 압축됩니다. 물론 이 말은 플라톤 철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매우 어려워 보이는 이 말을 조금 쉽게 풀이하면 “몸으로 느끼는 것보다는 머리로 사고하는 것이 진리에 더 가깝다. 눈, 코, 귀, 피부 등 인간의 감각기관으로는 삼라만상의 완전한 모습을 포착할 수 없으므로 현재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은 실재의 모습이 아니다. 인간의 이성적 사고 작용을 통해 걸러낸 사유의 대상만이 완전무결한 사물의 실재적 모습이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이성입니다. 희랍인(그리스인)들은 이성을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매우 신비적이고 선천적인 것이며 머릿속으로 추론해낼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합니다. 이 능력을 매우 신비스러운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속하지 않는 신성한 그 무엇’으로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철학자들은 서양의 철학사를 설명할 때 바로 이 ‘이성’을 똑부러지게 개념화하지 않은 채 이성, 오성 등 추상적 개념만을 강요해 왔습니다.

그런데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사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이 ‘이성’의 개념은 우리가 위에서 쭉 살펴본 ‘기하학적 이성’이 그 본질입니다. 기하학적 이성은 기하학을 공부해낼 수 있는 이해력입니다. 인간의 계산능력이며 추론능력이고 논리적 사유 능력입니다. 서양학자들은 근세철학 이래 이 이성을 모두 ‘UNDEDRSTANDING'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해력과 동일 언어입니다.

이제부터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존 로크의 인간 오성론 등의 번역서에 나타나는 이성, 오성에 주눅 들지 마십시오. 전부 인간의 이해력을 달리 표현한 단어일 뿐입니다. 기하학적 추론능력이 이성입니다.

서양철학 2,000년이 인간의 이성에 매달려 왔는데, 우리가 이제 그들이 고민하는 그 이성의 실체를 알았으니 서양철학의 문제를 이해하는 실마리는 찾았다고 할 것입니다. 서양철학을 알려면 플라톤을 알아야하고 플라톤을 알려면 기하학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어렴풋하지만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기하학과 기하학적 이성을 알아버렸으니 플라톤과 플라톤의 이데아를 이해한 것이고 플라톤과 플라톤의 이데아를 알았으니 서양철학사 2,000년의 문제 즉 ‘인간 이성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이제 서양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철학적 소양을 갖춘 것입니다. 축하합니다!

 

※저자 윤성호

인문학 대중화를 통해 사회공헌을 추구하는 인문학 글쓰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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