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호 칼럼] 누구나 알고 아무나 하는 인문학 <7>

안녕하십니까. 여러분과 인문학을 함께 공부할 윤성호라고 합니다.

그간 문학, 역사, 철학 등 소위 인문학으로 불리는 공부를 하며 조금이나마 얻은 지식을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이번에 컨슈머치와 함께 독자 여러분을 찾아뵐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우선 인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고, 종교와 예술과 철학이 어떻게 발생됐는지 살펴본 후 동·서양의 철학과 역사, 종교에 관해 고찰해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합니다.

<저자의 말>

소피스트를 아십니까? 인문학 공부를 별로 하지 않은 분이라도 고대 그리스에서 활동하던 ‘궤변론자’정도의 인식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어떻습니까? 초등학생 때 이미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을 통해 알았고 인류의 위대한 스승 또는 철학자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바로 소피스트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소피스트들이 저평가된 것일까요, 아니면 소크라테스가 과대평가된 것일까요?

 

소피스트 - 자연철학에서 인간철학으로 

고대 그리스는 폴리스(Polis)라는 도시단위의 국가입니다. 이 폴리스라는 도시 안에서 민주정치가 시행됐습니다. 물론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치는 지금과는 달라, 보통 성인이면 다 참여할 수 있는 대중 민주주의가 아니라 특권을 가진 자유 시민들만 누리는 제한된 형태의 민주주의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래도 동시대의 중국이나 페르시아 등이 전제 군주제를 시행하던 시기에 제한적이지만 민주주의를 도입했다는 사실이 매우 획기적이고 놀랍습니다.

B.C 5세기, 신과 자연철학의 나라 그리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리스는 큰 번영을 누리고 아테네는 그리스의 중심지로 자리 잡습니다. 무역 활동으로 경제생활이 윤택해지고 다양한 사상과 사람, 물자가 유입됩니다.

자유로운 의사표시가 가능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먹고 살만큼의 경제적 풍요가 있으니 어떻게 사는 것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해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신을 노래하고 자연과 우주의 원리를 규명하기보다는 개인의 행복에 천착합니다.

약간 어렵게 얘기하면 철학의 관심이 신과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아갑니다. 부자가 된 아테네 사람들, 재산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설득하고 적을 내편으로 만들어내는 기술이 중요해졌습니다. 당연히 이런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연마한 전문 ‘꾼’들이 나타납니다. 그리스 사회의 ‘족집게 선생님’으로 불릴 만 합니다. 우리는 이들을 소피스트로 부릅니다.

스피스트는 소피아(sophia, 지혜)를 어원으로 하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 상류사회의 시민과 귀족들이 이들에게 요구하는 수준은 높았고 이들 또한 부자들을 상대로 돈을 벌어야 하니 전문성을 고도로 훈련해야 했습니다. 자연철학을 하던 과학자 수준의 천재들이 이제 인간에 대한 연구와 인간사회에서 요구되는 처세술, 웅변술, 수사학 등 실용학문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들이 인간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보니 인간의 사고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인간의 능력에 한계가 있으므로 인간이 만든 법과 제도, 윤리와 도덕, 과학과 기술 역시 불완전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인간사의 모든 것이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니 절대적인 선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든 진리가 상대적입니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가치관을 전파하는데 최선봉에 선 대표선수가 프로타고라스입니다. 그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므로 세상의 진리와 인간의 행복은 사람에 따라 다르며 이 세상에는 절대적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말로써 이뤄지는 민주정치를 시행하던 아테네에서 진리가 상대적이라는 생각이 대세를 이루니 사회가 분화되고 복잡해집니다. 정치적 사회적 혼란도 가중됩니다. 말을 통한 소통의 필요성이 대두됩니다. 소위 '말빨' 센 놈이 이깁니다.

설득을 목적으로 한 웅변술 강의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소피스트들이 웅변술과 수사학의 대가들로 기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소피스트 시대 이후 언어학과 문법이 획기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들과는 약간 차별화된 소피스트, 소크라테스가 나타납니다. 그는 여느 소피스트들과는 다르게 유한한 세상에 불변하는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고 그 진리는 인간의 정신활동을 통해 찾을 수 있다는 새로운 주장을 했습니다.

 

인간적인 소크라테스 - 동성애자 혹은 불량남편 

소크라테스도 소피스트이니 인간의 문제에 관심이 많은 지식소매상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계 4대성인이라는 소크라테스를 자세히 살펴보니 그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입니다. 그냥 평범한 수준이 아니라 동성애자입니다. 부인과 자식도 있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양성애자입니다.

쇼킹합니까.

그의 애인은 그리스 상류 사회 최고의 아이돌인 미소년 알키비아데스입니다.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는 서로를 꽤 사랑했나 봅니다. 알키비아데스는 끊임없이 소크라테스를 유혹하고 소크라테스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끼고 돕니다. 거짓말 같지만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플라톤이 <향연> 등 저작에서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의 사랑에 대해 자세히 언급합니다. 알키비아데스가 끊임없이 육체적인 요구를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정신적 교감을 갖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며 정신적 훈육에 치중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쨌든 소크라테스가 그리스 최고의 미남 알키비아데스에 푹 빠졌던 동성애자임은 분명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크산티페입니다. 악처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크산티페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요? 소크라테스, 그는 미소년의 남자친구를 잊지 못하다 50이 넘어 10대 소녀와 결혼했고 결혼 후 생계는 내팽개친 채 시정에서 고담준론(高談峻論)이나 나누며 소일한 한량입니다. 늙은이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아준 크산티페가 악처인지, 소크라테스가 불량남편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동성애자에다 불량남편이니 그를 나쁜 사람 취급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세계 4대성인이라는 소크라테스도 인간적 한계를 갖는 평범한 사람일 수 있다는 인식에서 철학적 사고를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철학적 사고는 무전제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철학은 감동을 주는 문학이 아니라 논리적 분석이 필요한 과학이기 때문입니다.

 

철학, 권위의 극복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에게 배웠다고 합니다. 플라톤의 통찰이 소크라테스에게 빚진 부분이 있겠으나 사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피타고라스나 페르메니데스의 제자입니다. (이부분은 다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플라톤은 우리가 보는 세상은 불완전하고 시시각각 변하지만, 절대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세계가 우리의 두뇌 속에 따로 존재한다고 주장한 본질주의자 혹은 절대주의자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니 상대적 진리를 주장하며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소피스트들을 좋아할 리 없겠죠.

그러나 자신의 선생님인 소크라테스는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니 입맛에 맞았겠지요. 그래서 플라톤, 또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를 성스럽게 포장했고 심오한 철학적 사유를 한 위대한 성인으로 승격시켰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성스러운 철학자이고 소피스트들은 사회를 어지럽힌 궤변론자에 불과하다는 그들의 평가가 온당할까요.

소피스트들의 언어 논리는 치밀했고 그들의 사고는 창의적이고 기발했습니다. 독창적이면서 다양한 그리고 엄밀한 논리까지 갖춘 그들의 철학적 사고 방식은 그리스를 넘어 서양철학의 전통 확립에 큰 기여를 합니다.

3,000년전의 사람들이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계발하는 가운데 인간의 지극한 존엄성을 주장하고 인간의 주관적 판단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믿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 수호를 최고의 선으로 여기는 현대의 인간주의 가치관과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런 시대의 선각자들을 폄하한다면 동시대에 이들과 함께 활동한, 그 자신도 소피스트였던 소크라테스는 성스러운 성인의 반열에서 내려와야 하지 않을까요.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의 이름과 권위에 짓눌려 객관적인 평가와 논리적 비판을 유보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으므로 B.C 400년대를 살았던 플라톤 보다 훨씬 많은 정보와 지식으로 무장돼 있습니다. 선각자와 선현의 통찰을 존경은 하되 한번쯤은 그 권위에 도전해야 합니다. 21세기의 평범한 우리가 3,000년전의 플라톤보다 어떤 분야에서는 훨씬 뛰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그 원리를 규명하는 활동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권위에 주눅 들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규명 활동이 어려워진다면 본질 규명은 요원해지겠지요. 철학을 하는 사람은 성인으로 추앙받는 사람이라도 냉철하게 자기 잣대를 들이댈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젊은 인재들 특히 청소년들이 열린 마음으로 지식을 흡수하되, 권위 혹은 우상에 휘둘리지 않고 엄정하고 당당한 철학적 사고를 통해 홀로 서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어느 분야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당당하게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는 가운데 보편타당한 전인적인 리더십을 행사할 수 있는 저력을 길러줘야 합니다.

철학적 사고에서 그 힘이 나옵니다. 철학적 사고가 밑바탕을 이룬,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사회의 리더로 성장해야 그 사회가 반석 위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철학을 배우고 철학적 사고를 하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저자 윤성호

인문학 대중화를 통해 사회공헌을 추구하는 인문학 글쓰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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