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호 칼럼] 누구나 알고 아무나 하는 인문학<9>

안녕하십니까. 여러분과 인문학을 함께 공부할 윤성호라고 합니다.

그간 문학, 역사, 철학 등 소위 인문학으로 불리는 공부를 하며 조금이나마 얻은 지식을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이번에 컨슈머치와 함께 독자 여러분을 찾아뵐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우선 인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고, 종교와 예술과 철학이 어떻게 발생됐는지 살펴본 후 동·서양의 철학과 역사, 종교에 관해 고찰해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합니다.

<저자의 말>

리더십과 주술

리더십이란 집단의 공동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구성원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해내는 능력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지도자가 이런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어떤 자질이 요구될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답이 보입니다.

우선 머리가 좋고 지식이 풍부해야 하겠지요. 체력적으로 강건하고 남 앞에 솔선수범하고 희생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미래를 보는 안목으로 확고한 비전을 제시할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구성원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감능력도 중요합니다. 이런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으면 훌륭한 지도자가 될 요소를 거의 갖췄다고 봅니다. 여기에 행운까지 따라 준 사람들이 역사상 위대한 위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렇다면 고대사회의 지도자는 어떨까요? 색다른 리더십의 요소가 하나 더 추가됩니다. 영적인 능력입니다. 좋게 말해서 영적인 능력이지 시쳇말로 하면 ‘홀리는 능력’입니다. ‘홀리는 능력’이란 인간의 마음을 뺏고 정신을 지배하는 것인데, 이것을 가능하게 할 가장 강력한 무기는 주술과 종교입니다. 그래서 고대사회의 지도자는 강력한 주술사 혹은 영험한 종교의 힘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주술이란 초자연적인 특수 능력에 기대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행위이고, 종교란 인간이 당면한 복잡하고 냉혹한 현실 문제를 신에 기대어 해결하려는 일련의 행위이자 제도입니다. 주술과 종교는 동전의 앞과 뒤처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인간의 무지와 불안을 불쏘시개 삼아 생명의 불꽃을 유지하는 사실상의 동일체입니다.

2,000~3,000년 전 혹은 1,000년 전의 인류는 지금보다 무지했으므로 자연 현상 등에 대한 무지 때문에 불안과 두려움도 더 컸을 것입니다. 주술과 종교에 의지하려는 열망이 더 강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대는 주술과 종교의 시대이고 이 시대는 천재적인 사제와 주술사, 혹은 영험한 무당의 종교적 통찰이 정치권력의 카리스마와 직결됩니다.

우리는 이런 사회를 제정일치 사회라고 부릅니다. 제사의식을 집전하는 종교와 부족민을 다스리는 정치가 하나인 사회입니다. 제정일치 사회의 지도자는 정치지도자 겸 종교지도자로서 그 권력은 현대사회의 정치지도자에 비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강했습니다.

우리는 역사가 시작된 이래 종교지도자와 정치지도자의 두가지 역할을 동시에 한 대표적 인물 두 사람을 탐구합니다. 한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종교지도자 모세이고 한사람은 목동에 불과한 유목민을 세계적인 전사로 키워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정치지도자 칭기스 칸입니다.

 

 

모세, 종교 지도자의 모습을 한 정치 지도자

구약성서에 따르면 모세는 동족을 괴롭히는 이집트 관리를 죽이고 오늘날의 요르단 남부 미디안에서 40년 동안 양치는 목동으로 살다 80세가 되던 해 호렙산(시나이산)에서 민족을 해방시키라는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집트로 돌아와 파라오에 대항, 유대민족을 홍해를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데려가는 하나님의 충실한 대변자입니다.

한편, 현대 심리학의 시조 프로이트는 모세와 출애굽기에 대해 다른 주장을 합니다.

자신이 유대인이기도한 프로이트는 <모세와 일신교>라는 책을 통해 ‘모세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집트의 귀족으로서 다신교를 숭배하던 당시 이집트 사회에서 일신교를 믿는 종교 집단의 지도자였다. 그는 이집트 안에서 일신교 혁명을 주도했으나 실패했고 그 대안으로 이집트 사회의 이방세력인 유대인들을 규합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라는 당근과 야훼 하나님의 십계명이라는 채찍으로 자신의 꿈인 일신교 종교혁명을 실현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이밖에도 모세가 폭약 전문가로서 여러 가지 초자연적 현상인 구름기둥, 불기둥 등을 폭약으로 연출했고, 그가 평소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것도 폭발 실험으로 얼굴을 다쳤기 때문이라는 특이한 주장도 했습니다. 모세가 야훼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이스라엘 사람을 이끌었든, 프로이트 말대로 자신의 일신교 혁명을 위해 유대인을 활용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세의 어떤 리더십이 노예상태의 양치기들을 장장 40년간이나 한데 묶을 수 있었는지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세이후 후대의 정치, 군사, 종교의 지도자들과 학자, 역사가들은 모세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해 끊임없는 찬사를 보냅니다.

<군주론>의 저자로서 정치공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마키아벨리는 모세에 대해 ‘뛰어난 능력으로 군주의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하고 고대세계의 이상적 리더십을 행사한 4명 중 첫 번째 사람으로 모세를 꼽았습니다. 조지 워싱턴, 벤자민 플랭크린 등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도 모세를 높이 평가하는데, 식민지배자 영국을 이집트로, 식민지 미국을 이스라엘로 상징화하면서 자신들의 롤모델로 모세를 내세웠습니다.

미국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미국의 국민적 역사서 <Hero Tales from history(역사속 영웅이야기)>의 저자 스미스 번햄도 자신의 책에서 모세를 첫 번째 영웅으로 선정하고 그를 ‘위대한 입법자이자 온화한 리더십의 소유자’로 규정합니다. 인류 최고의 천재 아인스타인도 모세를 인류의 참지도자라고 극찬하는 등 서양사람 치고 모세의 정치적 리더십을 칭찬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물론 서양사회가 기독교 문명권 아래 있기 때문에 그런 평가가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반론도 있겠지만, 모세의 리더십이 탁월한 것은 정치와 역사를 공부한 동서양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객관적 팩트입니다.

그러면 모세 리더십의 어떤 요소가 후세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을까요?

첫째는 비전 제시 능력입니다. 그는 노예상태의 유대민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정착’이라는 비전을 제시해 그들의 피를 끓게 만듭니다.

둘째는 지적인 능력입니다. 모세는 모세5경(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 등 5종의 구약성서)을 직접 저술했고 당시 이집트 귀족의 언어와 문화에 통달할 정도였으니 당대 최고의 천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셋째 강건한 신체적 능력입니다. 모세는 120살까지 생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말 120살까지 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장수를 했다는 것은 확실하고 죽기 직전까지 듣고 말하는데 큰 지장이 없었으니 신체가 매우 강건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넷째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자기희생입니다. 모세가 아니라도 리더라면 누구라도 갖춰야 할 덕목이겠지요.

여기에 강인한 의지와 불굴의 용기, 먹고 사는 민생문제까지 책임졌던 현실감각 등이 모세를 불세출의 정치지도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이러한 세속적인 리더의 자질에다 누구도 갖지 못한 종교적, 주술적 능력이 있었습니다. 200만 명으로 알려진 엄청난 규모의 유대백성을 먹을 것, 입을 것도 변변치 않던 상황에서 40년간 이끌었다는 것은 주술적인 요소를 빼면 도저히 설명이 불가합니다. 주술의 관점에서 한사람을 홀리면 한사람의 지도자, 열사람을 홀리면 열사람의 지도자라고 했는데,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전체를 홀렸으니 그 주술적 신통력의 크기는 감히 가늠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교계에서는 출애굽 당시 유대인의 잠정 인구가 60만 명이니 총 인원은 200만 명이라고 추측한다는데, 당시의 여러 객관적 상황을 고려하면 최대 1만~2만 명, 상식적으로 수천 명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

그는 탁월한 영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야훼와 이스라엘 민족을 매개해 유사 이래 전무후무한 민족정신의 대단결과 통합을 이뤄냈고 그 통합의 정신은 지금의 이스라엘에 그대로 실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사회 리더십의 최종 마무리는 주술 혹은 종교를 활용한 권위의 확보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이끈 불세출의 정치 지도자였으나 겉모습은 야훼 하나님이라는 유일신을 대변하는 종교지도자 겸 주술사로 나타났습니다.

칭기스 칸, 정치 지도자의 모습을 한 세계 최고의 무당

아시아 인물 중 칭기스 칸 만큼 서양사람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심어준 인물은 아직까지 없습니다. 오죽하면 미국의 유력일간지들이 20세기를 마감하던 1990년대말 앞다퉈 인류 역사 1,000년내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 1위로 칭기스 칸을 선정했겠습니까(워싱턴포스트 1995년, 뉴욕타임즈 1997년, 타임 1991년). 콧대 높은 서양사람들이 아시아의 변방, 몽골의 지도자를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선정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잭 웨더포드라는 미국인 인류학자는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라는 책을 통해 칭기스 칸과 몽골제국을 군사, 문화, 역사, 과학 등 총체적 영역에서 조망했습니다.

그는 칭기스 칸이 이룬 업적에 대해 ‘칭기스 칸이 아들, 손자들과 함께 정복한 지역의 넓이는 아프리카 대륙과 비슷하며 미국, 캐나다,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의 섬들을 합친 면적보다 넓다. 현대 지도에서 칭기스 칸이 정복한 땅은 30개국이며 인구로는 30억 명이 넘는다. 당시 몽골부족 전체의 인구는 100만 명으로 여기에서 징집한 병사는 10만 명에 불과했다.

칭기스 칸이 이룬 업적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문맹의 노예 한 사람이 순전히 자신의 인격과 리더십 하나로 미국이라는 제국을 건립해 미국을 외세로부터 독립시키고 국민을 단결시켰으며 알파벳을 만들고 헌법을 쓰고 보편적인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것은 물론 새로운 전쟁방식을 고안해 캐나다에서 브라질까지 군대를 몰고 양대륙의 교역로를 열어 자유무역 지대를 개척한 것과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칭기스 칸은 어떤 리더십으로 이런 업적을 이뤘을까요. 칭기스 칸 리더십에 관한 수많은 연구와 저작이 그 이유를 분석하지만, 칭기스 칸 리더십의 본질은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입니다. 이러한 사고에서 타문화와 타종교에 대한 관용 정책이 나왔고 민족과 신분 등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는 능력위주의 인재 등용 정책이 나왔습니다.

그의 이러한 사고는 장남 주치가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측근들의 지속적인 의심과 반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고 다시는 이를 거론치 못하게 하는데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칭기스 칸은 10대 시절 아내 보르테를 경쟁부족인 메르키트족에게 약탈당한 뒤 6개월여가 지난 뒤 구출했는데, 알고 보니 보르테는 임신상태였고 얼마 후 주치를 출산. 일부는 납치당시 이미 임신상태였다고 주장하고 일부는 납치 후 임신했다고 주장해 주치가 칭기스 칸의 친아들인지를 놓고 형제와 측근 세력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음).

이러한 그의 개방성은 야율초재라는 참모를 발탁한데서도 나타납니다. 야율초재는 동양 역사상 최고의 참모로 회자되는 ‘제갈량’에 절대 뒤지지 않는 인물로 그는 몽골족이 원수로 여기는 거란족 출신입니다. 칭기스 칸은 야율초재가 거란족의 후예임에도 그를 죽을 때까지 옆에 뒀고 칸의 자리를 계승한 아들도 그를 중용해 대를 이은 개방적 리더십이 결국 팍스 몽골리카라는 새로운 역사를 열었습니다.

*팍스 몽골리카는 서양 학자들이 만든 용어로 몽골의 평화라는 뜻이며, 몽골 제국이 13-14세기 정복활동을 통해 유럽과 아시아에 사회,문화,경제의 안정을 가져온 시기를 이른다.

그 밖에 그를 1,000년내 최고의 지도자로 만든 요소로 웅대한 비전, 불굴의 의지, 끊임없는 소통, 효율적인 조직구성 능력 등을 꼽을 수 있겠으나 역시 칭기스 칸을 극강의 역사적 영웅으로 만든 것은 그의 주술적 능력에 있었습니다.

고대의 모든 유목민들이 그러하듯 몽골족도 천문 등 자연 현상의 과학적 분석에 취약하고 기상현상에 특별한 미신을 가지고 있는 등 주술적 행위가 생활 속에 깊이 뿌리박힌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늘의 뜻을 전달하는 영매(靈媒) 혹은 무당의 존재는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부족의 관습과 특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칭기스 칸은 부족 내부의 결속을 위해 부족의 무당과 주술의식을 존중하고 활용했습니다. 칭기스 칸은 전쟁에 나서기 전 반드시 무당에게 점을 치도록 하고 점괘가 좋을 때를 기다려 승리가 예언될 때만 출정했고 한발 더 나아가 무당이 승리를 예언하지 않을 수 없도록 미리 연출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주술을 활용해 전사들의 사기를 극대화 시키는 고도의 심리전이기도 합니다.

칭기스 칸과 주술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다. 몽골 최고의 무당 텝탱그리와 칭기스 칸의 협력과 갈등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몽골의 역사책인 몽골비사는 칭기스 칸의 전속무당 ‘텝텡그리’에 대해 언급합니다. 텝텡그리는 칭기스 칸이 몽골부족을 통합할 때 하늘의 뜻이 칭기스 칸에 있다는 예언을 통해 북방 유목민들의 민심을 모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칭기스 칸은 텝텡그리의 영적인 능력에 빚을 졌고 그의 능력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극진히 예우했습니다.

텝텡그리는 칭기스 칸의 후원을 배경으로 자신의 7형제와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해 세속사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합니다. 그는 몽골내 최고 권력의 한축으로 자리 잡습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차면 넘치는 법’입니다.

그는 부족민과 부족 전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도우미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칭기스 칸과 그 가족들의 사적인 영역을 침범한 것입니다. 그의 권력욕이 칭기스 칸의 동생을 대상으로 표출됩니다. 그가 칭기스 칸의 바로 밑 동생 카사르를 구타합니다. 이때까지는 칭기스 칸이 사건을 유야무야 처리합니다. 아직까지는 그를 활용할 가치가 있다고 여겼는지 크게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이에 우쭐한 텝텡그리는 칭기스 칸 형제들의 권력을 축소하고 자신 7형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야욕으로 칭기스 칸의 역린을 건드리는 도발을 감행합니다.

텝텡그리는 칭기스 칸에게 고변(告變,반역따위를 고발함)을 합니다. 그는 자신이 꿈을 꿨는데, 칭기스 칸이 몽골 전역을 통치하지만 그 옆에서 카사르도 몽골을 통치하고 있었다며 그 꿈은 칸의 자리를 노리는 동생 카사르를 제거하라는 하늘의 계시라면서 쿠데타 세력을 일망타진하라고 압박합니다. 칭기스 칸은 일단 텝텡그리의 말에 따라 카사르를 감금합니다.

당연히 가족들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칭기스 칸의 어머니 후엘룬은 둘째 아들이 감금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하루 밤낮을 낙타수레를 타고 들이닥쳐 아들 카사르를 묶은 밧줄을 풀게 하고, 칭기스칸을 불러 자신의 말라 비틀어져 무릎까지 축 쳐진 젖을 꺼냅니다. “이 젖을 봐라. 너와 네 동생들이 빨던 젖이다. 형제를 모르는 너는 탯줄을 갉아 먹고 태를 씹는 짐승이다”라며 극심한 분노감을 표출했습니다.

사실 이 말은 칭기스칸이 동생 카사르와 함께 그의 이복형 벡테르를 활로 쏘아 죽였을 때 했던 말이었습니다. 후엘룬은 ‘너는 어렸을때도 형제를 모르고 짐승 같은 짓을 하더니 아직까지도 형제를 돌보지 않는 짐승 같은 짓을 한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 말은 이복형 살해라는 원초적 죄의식에 시달리는 칭기스 칸에게 견디기 어려운 참담한 마음을 갖게 했을 것입니다.

칭기스 칸의 부인 부르테도 가세합니다. “텝탱그리는 칸이 죽으면 우리 가족을 위태롭게 할 것이니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칭기스 칸의 모든 형제들도 텝탱그리 형제들의 전횡과 월권, 치부(致富, 재산을 축적함)를 고발하고 그들의 처단을 강력히 원합니다. 그러나 텝탱그리의 제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칭기스칸이 벌이는 몽골부족 통일 사업의 동업자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동업자가 아니라 부족의 정신적 지주가 돼 몽골전사의 사기를 좌우하는 2대주주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승부사 칭기스 칸은 2대주주를 제거하겠다는 결단을 내립니다. 사실 텝탱그리 제거를 주저한 것은 누가 그의 역할을 대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텝탱그리 역할을 겸임해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자문을 지속한 끝에 용단을 내립니다. 텝텡그리의 제거는 몽골부족의 새로운 영적지도자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칭기스 칸은 텝텡그리를 그의 아버지, 7형제 모두와 함께 호출합니다. 텝텡그리 일행이 칭기스 칸의 게르로 들어오자 영문도 모르는 텝텡그리에게 느닷없이 동생 테무게와 씨름 시합을 하도록 명령합니다. 테무게는 기다렸다는 듯이 텝텡그리를 끌고나가 허리를 꺾어버렸고 죽어가는 텝텡그리를 천막에 내버립니다. 텝텡그리와 그 가족의 모든 영화는 종말을 고합니다.

칭기스 칸은 이로써 초원의 부족들을 연합해가던 과정에서 만난 모든 경쟁자 중 가장 강력한 경쟁자를 물리쳤습니다. 몽골인의 정신을 지배하던 라이벌을 제거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자리에 자신이 앉았습니다. 이때부터 칭기스 칸의 부하들은 칭기스 칸이 군사적인 힘만 가진 것이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부족내 어떤 무당보다 더 세다는 인식을 했습니다.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독재자가 최고로 영험한 무당의 지위까지 확보했습니다. 역사상 최고로 강력한 무당의 탄생이 예고됐습니다.

이제 칭기스 칸은 전쟁에 나서기 전 병사를 마음을 얻기 위해 무당의 힘을 별도로 빌어야 하는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전쟁을 결심하고,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선포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칭기스 칸은 텝탱그리를 제거한 후 거란의 요나라 세력과 여진의 금나라를 정벌했고 위구르와 호라즘은 물론 인도의 북부지역까지 개척하는 정복활동에 나서면서 스스로 무당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그는 정복전쟁에 나서기 전 따로 마련된 자신만의 거처로 들어가 짧으면 3~4일 길면 한달 정도의 기간을 가지고 몽골부족이 숭배하는 ‘영원한 푸른하늘’과 영적인 대화를 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의식을 거친후‘영원한 푸른하늘이 우리에게 승리를 약속했다’고 선포했습니다. 그의 전사들이 과거 텝텡그리가 신의 계시를 읊조릴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칭기스 칸에게 열광했습니다. 왜냐하면 칭기스칸은 단순한 무당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는 전우이기도 했으니까요.

칭기스 칸은 적의 상황을 예리하게 꿰뚫는 전략적 전쟁 마인드가 체화된 사람이므로, 그가 출정시기 등과 관련해 하늘로부터 받는 계시는 텝탱그리가 단순히 감으로 점지 받은 하늘의 뜻과는 승률 면에서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이제 칭기스 칸은 부족을 통일한 군주에다 부족의 정신을 지배하는 영적인 지배자가 됐습니다.

장군 겸 무당이 내뿜는 강력한 카리스마는 아들과 손자 세대까지 전승돼 눈 덮인 시베리아 툰드라부터 뜨거운 인도, 베트남에서 헝가리, 고려에서 발칸제국까지 개척한 원동력이 됐습니다. 우리가 장군 이미지의 칭기스 칸만을 머릿속에 그린다면 그의 리더십 중 상당 부분을 모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가장 큰 리더십은 영적 리더십이었으니까요.

종교와 주술을 대신할 새로운 시대의 영적 지도자?

현대는 종교와 주술의 시대아니라 과학과 철학의 시대입니다. 과학과 철학의 시대는 모세처럼 야훼 하나님과 아무도 몰래 계약을 하고 그것을 일방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습니다. 칭기스 칸처럼 스스로 하늘의 계시를 받았으니 무조건 따르라고 우기기도 어렵습니다.

과학과 철학이 주술을 대체한 시대에 국가와 사회를 이끌 지도자는 무엇으로 리더십을 확보해야 합니까? 무엇으로 민주주의 시민사회에서 표출되는 다양한 이견을 통합하고 무지와 비이성 그리고 아직도 잔재한 주술적 요소를 구축(驅逐, 어떤 세력 따위를 몰아서 쫓아냄)해낼까요? 그것은 바로 인류가 수많은 투쟁으로 만들고 지켜낸 민주주와 인권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수호하겠다는 신념입니다.

미신과 주술, 종교에 대한 맹목적 믿음으로 무조건 자신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지도자는 모두다 사기꾼이고 협잡꾼입니다. 건전한 상식과 논리적 이성으로 인간평등 혹은 홍익인간의 이념을 완수할 확고한 의지와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폭력과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로 이것을 달성해내야 합니다.

과학과 철학의 시대는 백마를 탄 초인이 홀연히 나타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약속하거나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 도와주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 시대의 초인과 영웅은 우리가 스스로 결정해 선택합니다. 우리가 과학과 철학의 혜안으로 인간의 보편적 인권과 복지를 보장하고 우리와 함께 그것을 확대 재생산할 인물을 직접 골라야합니다.

인문학적 지성으로 더욱더 분발해야만 주술과 종교에 편승하는 지도자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성과 과학에 기반한 건전한 상식을 가진 선량한 지도자를 선별해내는 일이야말로 인문학을 공부한 지성인이 반드시 해내야 할 과제입니다.

※저자 윤성호

인문학 대중화를 통해 사회공헌을 추구하는 인문학 글쓰기 작가

저작권자 © 컨슈머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