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재난, 불타 버린 초연결사회④

[컨슈머치 = 김은주 박지현 전향미 기자] 대한민국에 앞에 당연한 듯 따라 붙던 ‘IT강국’ 수식어가 지난달 KT화재로 한 순간에 무색해져 버렸다.

IT 의존도가 높은 ‘초연결망사회’ 속 아무리 단시간이라도 통신 장애가 초래하는 불편과 위험은 상상 이상이다.

중요도가 낮은 D등급 통신시설 화재 하나로 도심 일대가 ‘IT 블랙아웃’에 빠지는 대혼란을 겪으면서 무방비한 우리 사회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정부의 관리 부실이 화를 키운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5G시대에 ‘IT재난 취약국’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서울시 통신 화재 주무부처 어디?

지난달 24일 서울 도심에서 모든 기능이 중단됐다. 테러도 전쟁이 아닌 단순 화재가 원인이었다.

서울시 서대문구에 위치한 KT 건물 지하 통신구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인근 주민들은 유‧무선 전화와 인터넷 등 통신 장애는 물론이고, ATM 이용 및 카드 결제에도 곤란을 겪으며 평범했던 일상의 대부분이 차단됐다.

또한 통신망 장애가 시민과 상인들의 불편 뿐 아니라 치안‧의료 공백을 야기해 국민의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줬다.

당일 현장은 방문한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번 사고는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경고한 ‘위험사회’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위험 사회’ 이론은 산업화와 근대화를 통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현대인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준 동시에 새롭고 더 큰 위험을 몰고 왔음을 뜻한다.

실제 이번에 불이 난 통신구는 우리 사회의 '핫라인'이 집중돼 있어 문제가 생기면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가 안보와도 직결된다.

때문에 더 완벽한 재난 대응 시스템이 갖춰져야 맞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통신 안전에 무방비했던 점만 노출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단 명확한 관리 주관부처가 없다는 게 문제다.

현재 통신구와 전력구 등 지하구 내부에 설치된 케이블은 한국전력공사와 KT 등의 자체 내규로 유지·관리되고 있다. 지하구 관련 업무에 행정안전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지방자치단체 등이 엮여 있어 주관부처를 가리기 애매한데다 일원화된 지하구 안전관리기준도 마련돼 있지 않은 실정이다.

자유한국당 윤영석 대변인은 “지난 1994년 서울 종로5가 통신구 화재와 같은 해 대구 지하통신구 화재, 2000년 여의도 전기·통신공동구 화재 등 과거에도 비슷한 화재가 수차례 있었다는 점에서 관계부처의 책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26일 오전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힌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기업도 소홀했고 정부는 말할 것도 없었다"며 정부의 책임을 인정했다.

유 장관은 이어 “아현지사 외에도 앞으로 통신장애 가능성에 대해 세부적으로 시나리오를 작성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소방법 개정 및 통신재난 시스템 구축 등…소 잃고라도 외양간 고쳐야

세밀하지 못한 점검 시스템과 허술한 방재 설비는 대규모 이번 사건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통신구의 경우 화재 피해를 줄이기 위해 우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백업 통신망이 갖춰져야 하는데 KT 아현국사는 D등급 국사로 백업 체계가 전무했다. 전국 단위의 서비스에만 백업 체계를 갖추도록 하는 규정의 ‘허점’ 탓이다.

결국 통신망을 관리하는 거점인 통신국사에 제대로 된 방재·백업 시스템이 없어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이다.

미흡한 소방법 개정의 목소리도 높다. 통신사업용 지하구 중 500미터 이상에만 스프링클러 등 연소방지설비·자동화재 탐지 설비를 설치하도록 하는 규정을 손 보고, 통신장비 이중화 및 분산수용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

바른미래당 신용현 의원은 “통신기간시설에 대한 재난관리 상태가 상식 이하 수준으로 IT강국이라던 대한민국이 IT재난 취약국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며 “초기 화재진압시설 미비, 유사 시 백업 라인이나 우회 라인 미확보 뿐 아니라 환경 변화에도 불구하고 등급 지정 기준이나 관리에도 십수 년 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전형적인 관리부재를 보여줬다”고 꼬집었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모두발언 중이다(출처=홍영표 의원 페이스북)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모두발언 중이다(출처=홍영표 의원 페이스북)

더불어민주당 홍원표 원내대표 “소방법 규정에 허점이 있다면 법을 바꿔서라도 국가 기반시설에 준하는 수준의 화재 재난 대비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며 “철저한 대책 마련으로 다시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특히 전문가들과 시민단체 등은 정부가 이번 사고를 계기로 전쟁과 테러 등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 ‘통신 재난 대응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관계자는 “통신사가 제공하는 기술과 서비스에 대해 소비자들이 인식하는 중요도‧영향력 등을 고려하면 우리 사회에서 통신은 공익적 기능과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며 “문제해결을 위해 새로운 기준으로 접근하고 대책 모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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